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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득(自得), 스스로 터득한 자에게는

작성: 주영택 · 2026-04-26

들어가며

오래전 같이 일하던 동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가장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다들 새 프레임워크를 들고 들떠 있을 때, 그는 한 발 물러서서 천천히 묻고는 했다. "이건 결국 뭘 하려는 거지?" 처음에는 답답해 보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에 저렇게 느려서 어쩌나,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들 한바탕 새 기술에 휩쓸렸다가 다음 기술이 나오면 또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를 반복하는 동안, 그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거의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새 기술이 나와도 며칠 만에 본질을 짚어냈고, 옛 기술이 사라져도 동요가 없었다. 그가 오래 쥐고 있던 것은 유행이 아니라 원리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보였다.

그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居之安(거지안) — 거기에 머무름이 편안하다. 이 짧은 한 구절을 처음 마주친 곳이 『맹자(孟子)』의 「이루 하」편이었다.

이 글은 그 한 구절이 — 정확히 말하면 그 구절이 속한 한 단락 전체가 — 지금 이 시대의 학습에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1. 출처: 「이루 하」편 제14장

『맹자』는 7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편은 다시 상·하로 나뉜다. 「이루(離婁)」는 그중 네 번째 편이다. 이루는 전설상 시력이 가장 밝았다는 인물 — 100보 밖의 가는 털끝을 분간했다는 — 의 이름이다. 즉 이 편은 처음부터 '본질을 명확히 분별하는 일'을 화두로 깔고 시작한다. 그 「이루 하」 14장이 바로 학습의 본질을 정면으로 다룬 단락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也. 自得之, 則居之安. 居之安, 則資之深. 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故君子欲其自得之也.

군자심조지이도, 욕기자득지야. 자득지, 즉거지안. 거지안, 즉자지심. 자지심, 즉취지좌우봉기원. 고군자욕기자득지야.

— 군자가 도(道)로써 깊이 나아가는 것은, 스스로 터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스스로 터득하면 거함이 편안하다. 거함이 편안하면 의지하는 바가 깊어진다. 의지하는 바가 깊어지면 좌우 어디에서 취하더라도 그 근원을 만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스스로 터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섯 문장. 네 단계의 인과 사슬. 그리고 처음과 끝이 같은 말로 닫히는 수미상관. 맹자의 글 중에서도 가장 정밀하게 짜인 단락 중 하나다.


2. 自得(자득): 스스로 터득함

먼저 自得이라는 말을 들여다봐야 한다. 글자 그대로는 "스스로() 얻는다()"이다. 그런데 이 '얻음'은 정보를 받아 챙기는 차원의 얻음이 아니다.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이해를 가리킨다.

맹자는 이 말 앞에 深造之以道(심조지이도) — "도(道)로써 깊이 나아간다"는 조건을 붙였다. 이게 결정적이다. 자득은 얕게 닿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행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깊이로 들어가는 통로가 다. 즉 원리, 근본, 사물이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

이 두 단어 — 深造自得 — 가 서로를 정의한다. 깊이 나아가지 않고는 자득할 수 없고, 자득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깊이 나아갈 이유가 없다. 둘 중 하나만 빠져도 학습은 표면에 머문다.

현상을 외우는 것은 에 가깝지만, 自得은 아니다. 외운 것은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라서, 출처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진다. 자득한 것만이 자기 것이다.


3. 네 단계의 인과 사슬

맹자는 자득 이후의 풍경을 네 단계로 펼친다. 이 사슬을 한 번에 보면 다음과 같다.

단계한자풀이
1단自得之 (자득지)스스로 터득함
2단居之安 (거지안)거함이 편안함
3단資之深 (자지심)의지하는 바가 깊어짐
4단左右逢原 (좌우봉원)좌우 어디서나 근원을 만남

이건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각 단계가 다음 단계를 가능하게 하는, 엄격한 조건문의 연쇄다. 하나씩 풀어 본다.

3-1. 居之安 — 거함이 편안함

는 머무름이다. 한 자리에 자리 잡고 거기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자득한 사람은 그 자리에 하다 — 편안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이 한 구절이 학습의 본질을 가장 잘 짚는다. 외워서 안 사람은 그 자리에 거함이 편안하지 않다. 누가 다른 의견을 내거나, 새로운 사례가 등장하거나, 시대가 바뀌면 동요한다. 남에게 기대어 안 사람은 그 사람이 사라지면 무너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터득한 사람은 다르다. 그가 안 것은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것이라서, 외부의 변화가 그 앎을 흔들지 못한다. 새로운 사례가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다른 의견이 나와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 자리에 편안하다. 그래서 거함이 편안하다.

3-2. 資之深 — 의지하는 바가 깊어짐

는 본래 재화·자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의지하는 바", "기댈 수 있는 바탕"의 뜻으로 쓰인다. 은 깊다는 뜻.

거함이 편안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더 깊이 파고든다. 흔들리지 않으니까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고, 오래 머무니까 더 깊이 들어간다. 동요하는 사람은 깊이 들어갈 수 없다. 자꾸 새 자리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양의 피드백 루프다. 자득 → 거함의 편안함 → 더 깊은 의지처 → 더 단단한 자득. 시간이 갈수록 이 사람의 앎은 더 깊어진다.

3-3. 左右逢原 — 좌우 어디서나 근원을 만남

마지막 단계는 글이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左右逢原 — 글자 그대로는 "좌든 우든 어디서 취하더라도 그 근원()을 만난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의지하는 바가 깊어진 사람은 어떤 새로운 문제를 만나도, 어떤 낯선 영역을 만나도, 그 안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근원을 발견한다. 새로운 기술을 만나도 그 안의 익숙한 패턴을 본다.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도 자기 분야의 원리와 통하는 지점을 찾는다.

이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학습은 더 이상 '새로운 정보의 축적'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근원의 또 다른 발현을 알아보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영역으로 가도 막히지 않는다. 좌우 어디서든 근원이 그를 마중 나온다.


4. 왜 도(道)로써 나아가야 하는가

여기서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맹자는 자득에 이르는 길을 深造之以道 — "도()로써 깊이 나아가라"고 했다. 왜 그냥 "깊이 나아가라"가 아니라 굳이 "도로써"인가?

깊이 나아가는 방식은 둘이다. 하나는 현상을 더 많이, 더 자세히 쌓는 길이다. 사례를 천 개 외우고, 사용법을 만 개 익히고, 문서를 십만 페이지 읽는 길. 이 길로도 깊이 들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깊이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의 깊이다. 표면에서 면적을 넓힐 뿐, 바닥으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가 以道의 길이다. 현상을 보면서 그것이 그렇게 된 까닭, 그것이 가능한 원리, 그것을 관통하는 패턴을 묻는 길. 이 길은 수직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어느 깊이에 이르면, 표면에서는 전혀 달라 보였던 것들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득은 이 두 번째 길에서만 일어난다. 첫 번째 길에서는 은 가능해도 自得은 어렵다. 외부의 사례를 안 것이지, 자기 안에서 원리를 길어 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는 深造之以道라는 조건을 단단히 박아 두었다.


5. 자득의 반대편: 빌려온 앎

맹자가 自得이라는 말로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지를 보려면,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을 같이 읽어야 한다.

「진심 상」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行之而不著焉, 習矣而不察焉, 終身由之而不知其道者, 衆也.

— 행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못하고, 익히면서도 그 까닭을 살피지 못하며, 평생 그것을 따르면서도 그 도(道)를 알지 못하는 자가 대다수다.

이게 자득의 반대편이다. 행하기는() 한다. 익히기도() 한다. 평생 그것을 따르기까지(終身由之) 한다. 그런데 까닭을 모른다.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알지만 왜 그렇게 되어 있는지는 모른다.

맹자가 (대다수 중)을 들어 "그런 자가 대다수다"라고 한 말은 가혹하게 들리지만, 그가 보기에 이건 도덕적 책망이 아니라 사실의 진술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 현상의 표면을 살아가지만 그 표면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한다.

자득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가 여기 있다. 둘 다 행하고 익힌다. 그러나 한 사람은 에 닿고, 다른 한 사람은 평생 표면에 머문다.


6. 사상사적 위치: 위기지학(爲己之學)의 뿌리

맹자의 이 단락은 후대 동아시아 학습론의 가장 깊은 뿌리 중 하나가 된다. 송대 성리학에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학문의 두 갈래를 구분했다.

구분풀이
위기지학 (爲己之學)자기를 위한 학문. 스스로 터득하고 자기를 완성하기 위한 공부.
위인지학 (爲人之學)남을 위한 학문.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하는 공부.

이 구분의 출처는 사실 『논어』의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 — "옛 학자는 자기를 위해 공부했고, 지금 학자는 남을 위해 공부한다"는 구절이지만, 그 爲己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가장 정밀하게 풀어 보인 것이 바로 맹자의 自得이다.

위기지학의 본질이 자득이고, 자득의 본질이 居之安이다. 남에게 보이려고 한 공부는 남이 사라지면 기댈 곳이 없어진다. 그러나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공부는 거함이 편안하다.

조선의 퇴계 이황은 이 자득을 학문의 최고 경지로 두었다. 그가 평생 강조한 居敬窮理(거경궁리) — 마음을 경()에 머물게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캐묻는 공부 — 가 결국 자득에 이르는 길의 다른 이름이다. 「퇴계집」에는 자득을 언급한 편지가 수십 통이 넘는다. 그에게 학문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안에서 진리를 길어 올리는가의 문제였다.


7. 그래서, 지금

처음의 동료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가 새 기술이 나올 때마다 가장 늦게 도착했던 이유를 이제는 안다. 그는 표면을 빠르게 훑는 데 관심이 없었다. 표면 아래로 내려가서 그 기술이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늦게 도착했지만, 한 번 도착한 자리에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深造之以道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居之安 — 거함이 편안한 자리에 도달했고, 資之深 — 의지하는 바가 깊어졌으며, 마침내 左右逢原 — 어떤 새 기술을 만나도 그 안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근원을 알아보는 자리에 닿았다.

소프트웨어의 시대는 표면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작년의 프레임워크가 올해 사라지고, 올해의 패러다임이 내년에 낡아진다. 이 흐름 위에서 표면만을 좇는 사람은 평생 따라잡지 못한다. 새로 나온 것을 외우는 속도가 새로 사라지는 것의 속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 아래로 한 번 내려간 사람은 다르다. 그가 길어 올린 것은 표면이 아니라 표면을 만든 원리이고, 원리는 표면보다 천천히 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居之安 — 거함이 편안하다.

맹자가 2,300년 전에 한 말이 지금 이 시대의 학습자에게 그대로 닿는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 자체로 가 무엇인지에 대한 작은 증거다. 표면은 변하지만 원리는 머문다. 사람의 학습 또한 그러하다.


故君子欲其自得之也. — 그러므로 군자는 스스로 터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맹자의 단락은 처음과 같은 말로 닫힌다. 자득을 바라는 일 — 그것 하나가 시작이자 끝이다. 거함의 편안함도, 의지하는 바의 깊음도, 좌우에서 근원을 만나는 일도, 모두 스스로 터득하기를 바라는 그 한 가지 마음에서 시작되어 그 한 가지 마음으로 돌아간다.

학습의 처음과 끝이 같은 자리라는 것 — 어쩌면 이게 맹자가 우리에게 진짜로 남긴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