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어서는 마음에 대하여
— 『논어』 옹야편의 한 구절을 다시 읽으며
들어가며
오래된 회사 동료가 술자리에서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후배가 잘되는 게 그렇게 싫더라고.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 같은 거야."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잠깐 멍해졌다. 그 본능이라는 것이 정말 본능일까. 사람은 정말 옆 사람이 일어서는 것을 견디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거대한 의자 빼앗기 게임에 불과할 텐데.
그런데 다른 한편에는 다른 풍경도 분명히 있다. 자기가 막 자리잡은 지식을 아낌없이 풀어주는 선배. 자기 시간을 쪼개 후배의 발표를 같이 다듬어주는 선임. 자기보다 어린 사람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 옆에 있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그들 곁에 있으면 나도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을.
그 두 풍경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며칠을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떠오른 것이 공자가 자공에게 했다는 한 마디였다.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달하고자 하면 남을 통달하게 한다.
이 글은 그 한 문장을 천천히 풀어본 기록이다. 왜 공자가 인(仁)을 묻는 자공에게 정의가 아닌 방법을 답했는지, 입인달인이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인간 욕망의 구조 자체에 대한 통찰인 이유, 그리고 그 마음이 본래 가능한 일인데도 현실에서 그토록 자주 무너지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다.
1. 자공의 질문과 공자의 답
이 구절은 『논어』 「옹야(雍也)」편 마지막 장에 나온다.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묻는다.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何如?可謂仁乎? — 만일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인(仁)이라 할 만합니까?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 가장 정치적·경제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가 던진 질문은 자기 스케일에 맞다. 널리 베풀고 많은 이를 구제하는 것(博施濟衆) — 큰 그림이고, 큰 덕행이다. 그런데 공자의 답은 의외다.
何事於仁,必也聖乎!堯舜其猶病諸! — 어찌 인에 그치겠는가, 반드시 성(聖)이라 해야 한다! 요(堯)와 순(舜)도 오히려 그것을 어려워하셨다!
박시제중은 인(仁)을 넘어선 성(聖)의 영역이고, 성왕인 요·순조차도 다 못 한 일이라는 답이다. 자공의 질문은 너무 크다. 너무 멀다.
그리고 공자는 자공의 시선을 가까이로 끌어당긴다.
夫仁者,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能近取譬,可謂仁之方也已。 — 무릇 인이라는 것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달하고자 하면 남을 통달하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서 비유를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을 행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답의 구조가 중요하다. 공자는 인(仁)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대신 **인을 행하는 방법(仁之方)**을 보여줬다. 큰 덕행으로 멀리 가지 말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가까이서 시작하라는 것이다.
2. 입(立)과 달(達) — 인간이 욕망하는 두 가지
이 문장의 핵심은 '서다(立)'와 '통달하다(達)'라는 두 동사에 들어 있다. 공자는 왜 하필 이 둘을 골랐을까.
立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 서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자기 위치를 갖고, 독립된 인격으로 존재하는 것.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서는 것이다.
達은 막힘없이 통하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능력과 뜻이 세상에 가닿고,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실현되는 상태.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자기다움이 펼쳐지는 것이다.
즉 공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두 가지 근본 욕망을 정확히 짚었다.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立), 그리고 펼쳐지고자 하는 욕망(達). 이건 사치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그리고 공자의 통찰은 여기서 일어난다. 내가 서고 싶다는 그 마음, 내가 펼쳐지고 싶다는 그 마음 — 그 마음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옆 사람에게도 똑같이 있다. 그러니 내 욕망의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타인의 욕망의 구조도 이해하게 되어 있다.
이게 핵심이다. 공자에게 인(仁)은 자기를 비워서 남을 위하는 희생이 아니다. 자기 욕망을 정확히 알면, 거기서 타인이 보인다는 것이다.
3. 능근취비(能近取譬) — 가까이서 비유를 취하다
공자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사실 가장 무겁다.
能近取譬 — 가까이서 비유를 취하다.
譬는 '비유하다'는 뜻이다. 무엇을 비유하는가? 나를 가지고 남을 비유한다. 즉 내 마음을 자(尺)로 삼아 남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이다.
이 발상이 특별한 이유는, 도덕의 출발점을 나 자신에 대한 정직한 인식에 두었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성인의 가르침이나 신의 명령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내가 무시당했을 때 아팠다면, 남을 무시하지 마라. 내가 인정받고 싶었다면, 남을 인정하라. 내가 자리를 갖고 싶었다면, 남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라. 내가 펼쳐지고 싶었다면, 남이 펼쳐지도록 도우라.
이 단순한 추리가 가능하려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욕망을 부정하거나 미화하는 사람은 남의 욕망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능근취비는 도덕의 기술이기 이전에 자기 인식의 기술이다.
흥미로운 건 이 점이다. 공자는 인을 추구하는 데 특별한 자질이나 훈련을 요구하지 않았다. 가까이서 비유를 취할 수 있다면 — 즉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 그게 이미 인의 방법이라고 했다. 인(仁)은 멀리 있지 않다는 공자의 일관된 태도가 여기 다시 드러난다.
4. 충서(忠恕) — 적극적 황금률
이 구절은 사실 공자의 더 큰 사상 체계인 충서(忠恕)의 한 갈래다. 『논어』 「리인(里仁)」편에서 공자는 "내 도는 하나로 꿰뚫는다(吾道一以貫之)"고 했고, 증자는 그것을 "충서(忠恕)일 뿐"이라 풀이했다.
- 忠: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 (中 + 心)
- 恕: 남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헤아리는 것 (如 + 心)
그리고 이 충서가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 방향 | 구절 | 출처 |
|---|---|---|
| 소극적 황금률 |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 안연편 |
| 적극적 황금률 |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 옹야편 |
서양 윤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황금률(Golden Rule)이 "Do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unto you"로 적극형인데, 동양 사상에서는 두 형태가 모두 발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극형(勿施於人)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의 윤리다. 해를 끼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둔다. 적극형(立人達人)은 해야 할 것의 윤리다. 적극적으로 남이 일어서고 펼쳐지도록 돕는 것에 초점을 둔다.
칸트가 정언명령을 통해 도달하려 했던 윤리적 보편성을, 공자는 자기 욕망에 대한 정직한 응시 한 번으로 이미 도달했다. 그것도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수행 가능한 일상의 방법으로.
5. 사상사적 확장: 정약용의 재해석
이 구절은 후대에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다산 정약용의 독해다.
다산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 이 구절을 인(仁)의 본질을 관계성으로 보는 결정적 근거로 삼았다. 그에게 인은 마음 안에 있는 어떤 본체나 추상적 덕성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二人)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仁이라는 글자 자체가 '人 + 二'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다산은 주목했다.
仁者 二人也. 人與人之相愛者 仁也. — 인이란 두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인이다.
다산의 이 해석은 입인달인이 왜 인(仁)의 방법이 되는지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인은 혼자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다. 남이 일어설 때 비로소 나도 인(仁)에 도달한다. 남의 통달이 곧 내 인(仁)의 완성이다.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입인달인은 단순히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에 가깝다. 인간은 혼자 인(仁)할 수 없다. 함께 일어서지 않으면 누구도 일어선 것이 아니다.
이 해석이 송대 주자학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자가 인을 마음의 본체(心之德)이자 사랑의 이치(愛之理)로 형이상학화했다면, 다산은 그것을 인간관계의 구체적 실천으로 끌어내렸다. 입인달인 한 구절이 두 거대한 사상 체계의 분기점에 서 있는 셈이다.
6. 입인(立人)이 박시제중(博施濟衆)으로 가는 길
다시 처음의 구도로 돌아가자. 자공은 박시제중(博施濟衆)을 물었고, 공자는 그것은 너무 크다고 답하면서 입인달인을 제시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둘은 단절되어 있지 않다. 입인달인은 박시제중의 축소판이 아니라, 박시제중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박시제중을 거대한 정치 프로젝트로 시작하면 실패한다. 자기 마음 한 자락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천하를 구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는 자공의 시선을 멀리서 가까이로, 추상에서 구체로, 천하에서 자기 옆자리로 끌어당겼다.
옆 사람을 일어서게 하는 것 — 그 작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결코 천하를 구제할 수 없다. 반대로, 옆 사람을 일어서게 하는 사람은 이미 박시제중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 점이 공자의 천재성이다. 거대한 도덕적 이상을 가까운 일상의 행위로 환원하면서도, 그 일상의 행위가 여전히 거대한 이상으로 통한다는 길을 열어두었다. 큰 것과 작은 것을 분리하지 않은 것이다.
7. 그래서, 지금
처음의 풍경으로 돌아간다. 후배가 잘되는 게 본능적으로 싫다는 그 동료의 말. 그게 정말 본능일까.
공자식으로 보면, 그것은 본능이 아니라 가꾸지 않은 마음의 황무지다. 자기가 서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남이 서는 것의 의미도 안다. 자기가 펼쳐지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사람은 남의 갈망도 알아본다. 그게 본성이다. 그 본성을 외면하기를 오래 연습한 사람만이 "본능적으로 후배가 잘되는 게 싫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은 본능이 아니라 반복된 외면의 결과다.
다른 한편의 풍경 — 자기 시간을 쪼개 후배의 발표를 다듬어주는 사람, 자기보다 어린 사람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 — 그 사람들이 특별히 이타적이거나 자기를 비운 게 아니다. 그저 자기 욕망을 정직하게 들여다본 사람이다. 자기가 일어서고 싶었던 그 마음이 옆 사람에게도 똑같이 있다는 걸 본 사람이다.
공자가 말한 능근취비(能近取譬)는 결국 그것이다. 자기 마음에서 출발해서 자기 마음에서 끝나지 않는 것.
그러니 입인(立人)을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옆 사람에게서 같은 욕망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으니까.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우라. 자기가 통달하고자 하면 남을 통달하게 하라. 이 한 문장이 2500년을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 명령이기 이전에 인간 욕망의 구조에 대한 가장 정직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같이 일어서지 않으면, 누구도 진짜로는 일어선 것이 아니다.